경포 벚꽃, 鏡浦
절정의 아름다움을 만나러 가는 길
경포호수를 빙 둘러 이어지는 길 위에는 내 삶의 흔적들이 꽃잎처럼 흩어져 있다. 어릴 때는 초당에 사시던 작은 할아버지를 뵈러 가기 위해 호숫가를 걸었고, 까까머리 사춘기 때는 자전거를 타고 씽씽 호숫가를 돌았다. 장발의 청춘 시절에는 담배와 외로움을 물고 홀로 호숫가를 걷곤 했다.
경포호수를 다 돌고 나면 그 다음에는 바다로 향했다. 경포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순긋, 사천, 연곡, 영진, 주문진이, 남쪽으로는 강문, 송정, 안목이 펼쳐졌다. 어떤 때는 북쪽으로, 또 어떤 때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포바다의 입구에 들어서면 나는 마치 양쪽에 날개를 달고 있는 새와 같았다.
바다에 주인이 없는 것처럼, 경포호수와 경포호숫가에도 주인이 따로 없다. 굳이 주인을 찾자면 빼곡한 갈대요, 이따금 튀어 오르는 물고기요, 유유자적하는 새들이다. 최근에는 오십 년 만에 다시 부활한 경포습지의 가시연과 생태계 깃대종인 수달이 주인목록에 들었다. 주인이 없으되, 모두가 주인인 세상이 자연이요, 생태라는 사실을 이곳에 오면 깨닫게 된다.
인간은 단지 멀찍이 떨어져서 이 생태와 자연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감상하다 갈 뿐이다. 옛 선인들은 지혜롭게도 이 경포 호숫가 곳곳에 단아한 누정(樓亭)을 짓고 이 풍광을 즐겼다. 전국에서 밀집도가 가장 높은 12개의 누정은 그 자체로 인문학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이는 시를 통해, 글씨를 쓰는 사람은 글씨를 통해 이 절경을 그려냈다.
나는 때때로 옛 선인들의 눈썰미를 훔치곤 한다. 경포 호수에 내리는 가랑비를 감상할 때는 어느 정자가 좋은지, 눈이 내릴 때는 어느 정자가 좋은지, 멀리 경포바다를 완상하고 싶을 때는 어느 정자의 처마 밑에 서는 게 좋은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강릉에 사는 지복(至福)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길 위에 흩어진 꽃잎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는 나이가 되자, 경포 호수로부터 시작된 길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호수가 지닌 여성성, 바다가 지닌 남성성이 없었더라면 내 정서 또한 마구 휘청거렸을 거라는 깨달음이 왔다. 진심으로 절을 하고 싶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화사하게 봄을 장식하는 벚나무는 그 상징들 중 하나이다. 초입부터 길게 늘어서 경포호숫가로 길을 안내하는 벚나무가 여성성의 한 상징이라면, 바닷가에 줄지어 서서 해풍을 맞고 있는 소나무는 남성성의 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상징을 한 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봄이 오고, 3월의 끝자락에 이르면 강릉 시내의 벚나무들은 곳곳에서 벚꽃을 터뜨린다. 특히 계단을 따라 오르며 길게 터널을 이루는 남산의 벚꽃은 절창(絕唱)이다. 남산 벚꽃이 절정을 향해 달려갈 때쯤 되면 강릉 사람들의 눈은 경포로 향한다. 벚나무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다.
내륙보다 기온이 낮은 해안가라 경포 호숫가 벚나무들은 내륙의 만개한 동료들을 바라보면서도 멈칫거린다. 예고 없이 봄비가 내릴 때는 세상으로 살짝 내밀었던 꽃잎들을 다시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소녀의 몸짓이다. 벚나무는 이처럼 바깥세상의 동태를 여러 번 살핀 끝에 어느 한 순간 숨겨왔던 꽃들을 세상 속으로 왈칵 쏟아낸다. 바깥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일순간 터져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 시작되는 명시 <낙화(落花)>를 썼던 이형기 시인은,이 시와 짝을 이루는 시 <만개(滿開)>를 쓰면서
"한시도 쉬지 않던 너의 발걸음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구나 벚꽃의 만개여"라고 노래한 바 있다.
시시때때로 경포호숫가를 찾는 나에게 경포 벚꽃의 만개는 여성성의 만개이자 절정으로 다가온다.
봄이 오고, 눈부시게 벚꽃이 피면 경포호숫가를 도는 내 발걸음도 그 아득한 절정을 향해 간다.
글 : 이홍섭,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강릉, 프라하, 함흥》《터미널》외 다수
사진 : 윤기승, 이제욱, 강릉시청, 박상운
◈ 여행정보
- 강릉바우길 학이시습지길. 경포로 군정교에서 경포대에 이르는 3㎞ 남짓의 짧은 길이다. 관동팔경의 관문으로 도로 양 옆으로 수십 년 된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4월 벚꽃축제 기간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강릉의 대표적인 꽃 길이다.
- 습지해설 서비스는 가시연습지 방문자센터에서. 11명의 습지 해설사와 자연환경해설사가 경포 호를 비롯한 가시연습지의 생태해설. 사전예약 제. 현장에서 직접 신청도 가능하다.
◈ 문의
- 경포도립공원 033-640-5904 , 강릉시청 녹색성장과 033-640-5104
- www.baugil.org, 033-645-0990, 070-4218-0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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